세계문자 가운데 한글, 즉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합니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글은, 정확히 말해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은 진즉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1910년대 초에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이란 크다는 것을 뜻하니, 한글은 ‘큰 글’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서문을 쓰고 정인지 같은 신하들에게 글자에 대한 설명을 적게 한 것입니다. 이 책이 1940년에 안동에서 발견될 때까지 우리는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 해서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전적으로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의 공입니다. 선생은 아주 비싼 가격으로 이 책을 샀고 6∙25 때에도 이 책 한 권만 들고 피난 갈 정도로 이 책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분입니다. 이 분도 [직지]를 세계에 알린 박병선 선생처럼 우리의 문화영웅입니다.
한국인들에게 과거 유산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열이면 열 모두 한글을 말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대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기 때문” 또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므로”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배우기 가장 쉬운 문자라서”라고 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답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일 뿐,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합니다.
우선 한글이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문자는 그 나라 말만 정확하게 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로는 영어의 ‘f'나 'th'를 적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다음으로 한글이 세계 언어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 있는 램지(Ramsey) 교수는 한글날에 학생들과 조촐한 자축연을 했답니다. 이렇게 멋진 문자가 나온 날을 축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한글이 ‘과학적’인지 잘 모릅니다.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것도 이같은 ‘한글의 과학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한글은 그 치밀함과 복잡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가장 기본적인 것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인류의 문자 발달사를 간단하게나마 살펴야 합니다. 인류는 알다시피 한자 같은 상형문자로 언어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글자 수가 많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글자를 보아도 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문맹률이 높았던 것이죠. 예를 들어 ‘西’자는 음이 ‘서’인 것을 대부분 알지만 이 글자와 비슷하게 생긴 ‘茜’자는 음이 ‘천’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 때문에 인류는 일본 문자 같은 음절(syllable) 문자를 만들어냅니다. 일본어도 표음 문자입니다만 자음과 모음이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자의 ‘加’에서 따온 히라가나의 ‘か(카)’는 자음과 모음을 분리할 수 없지요? 그런데 우리글로는 ‘ㅋ+ㅏ’로, 로만 글자로는 ‘k+a'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글이나 로만 글자가 더 진보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한글과 영어의 진화 정도가 같습니다.
이제부터 한글의 과학성이 나옵니다. 어떤 외국인이든 대학 정도의 학력이면 1 시간 안에 자기 이름을 한글로 배워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외국어를 한 시간 만에 배워서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을까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한글의 자음부터 볼까요? 한글의 자음에서 기본 되는 것은 ‘ㄱ∙ㄴ∙ㅁ∙ㅅ∙ㅇ’인데 국어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런지 이것을 아는 한국인은 별로 없습니다. 자음은 이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획을 하나 더하거나 글자를 포개는 것으로 다른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ㄱ·ㅋ·ㄲ’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앞 글자 다섯 개만 알면 다음 글자는 그냥 따라옵니다. 그런데 이 다섯 자음도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자들은 발성 기관이나 그 소리 나는 모습을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ㄱ"은 '기역' 혹은 '그'라고 발음할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입니다. 이것은 다른 글자도 마찬가지라 ‘ㅇ’ 같은 경우는 목구멍의 모습을 본 뜬 것이지요. 그래서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배우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한 시간 안에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건 이런 원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한글의 가장 큰 특징은 소리와 글자의 상관관계까지 생각해 만든 글자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영어의 ‘city'는 ’시티‘보다는 ’시리[siri]‘라고 발음되지요? 또 ’gentleman'은 통상 '제느먼[ʤénmən]‘으로 발음됩니다. 이것은 t라든가 r, n은 같은 어군이라 서로 음이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영어 글자들은 그 생김새에 아무 유사성이 없지요? 그래서 다 따로 외워야 합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이 글자들이 모두 혓소리(설음, 舌音)에 속한다는 것을 아시고 같은 군에 모아두었습니다. 즉 ‘ㄴ·ㄷ·ㅌ·ㄸ(ㄹ은 반혓소리)’이 그것으로 글자의 형태들을 유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에 경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과학적 원리에 따라 한글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천지인 3개의 기호만으로 모음을 표현해
모음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그 복잡한 모음 체계를 어떻게 점(ㆍ) 하나와 작대기 두 개(ㅡ, ㅣ)로 끝낼 수 있었을까요? 가장 간단한 것으로 가장 복잡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 ‘ㆍ, ㅡ, ㅣ’에는 각각 하늘∙땅∙사람을 뜻하는 높은 철학까지 담겨 있습니다. 한글은 이렇게 간단한 모음 체계로 가장 많은 모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천재적인 창조성 때문에 우리 한글은 휴대폰에서도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자판에 한글을 다 넣어도 자판이 남아돌아가니 말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문자가 있을 수 있을까요?
반포 450년 후에나 우리 글로 인정받은 한글, 앞으로 더욱 아끼고 바르게 사용해야
한글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글은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한글이 국문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것은 반포 450년 후인 갑오경장(1894년~1896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기에 어려운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 왔는데, 지금은 영어 때문에 영 맥을 못 춥니다. 영어는 못 배워 야단인데 한글(한국어)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말과 글은 쓰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한글을 지금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보았습니다마는 한글은 여기서 설명한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위대한 문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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